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에즈 운하 (문단 편집) === [[영국]]의 운하 매입 === 그러나 운하 개통 불과 2년 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전쟁 결과,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가 참패하고 말았다. 단일개체로서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최대보유자는 17만 주를 가진 이집트 정부였고, 이집트 정부의 가장 지지 세력은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 정부가 직접적으로 보유한 지분은 없지만, 이집트의 자체적인 경제력이나 [[재정자립도]]가 낮은 상황에서 프랑스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에즈 운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이집트의 [[스폰서]]를 자처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퇴위했다. 뒤를 이은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공화정부]]도 이집트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당장 패전상황을 추스르며 [[프로이센]]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국방력을 재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에 프랑스로부터의 지원이 현격히 줄어들 가능성이 생겼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의 부족한 물동량도 문제였다. 전술한 요금 정책 때문에 수에즈 운하의 이용량은 기대를 밑돌았다. 거기에 더해 건설 비용도 2배로 들었기 때문에, 비용 부족에 시달린 끝에 실제 운하의 완성은 2년 후인 1871년이었다. 결국 요금을 올리려 하였고, 1873년에 운하의 이용 비용을 배의 배수량만이 아니라 화물의 톤수까지 따져서 요금을 매기게 된다.[* 이 규정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위의 이유로, 결국 수에즈 운하는 충분한 수입이나 추가 비용 지원이 들어올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수에즈 운하 주식은 실질적으로는 공사비용을 조달하는 채권에 가까웠다. 즉, 이집트 정부는 17만주만큼의 부채를 지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당장 주요 [[은행]]에 대한 [[채권]] 만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1875년]] 11월, 사이드 파샤의 후계자인 이스마일 파샤는 눈앞에 닥친 빚폭탄을 피하고, 프랑스가 주도한 수에즈 운하에 사실 별로 관심 없었다는 [[제스처]]로서 전체 주식 물량의 44%인 보유 지분 17만 6,602주를 매물로 내놓았다. 이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17만여주를 통째로 매입한 곳은 바로 '''[[영국 정부]]'''였다. 그 이유는 영국 입장에서도 수에즈 운하는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장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희망봉에 있는 케이프 식민지를 경유하지 않고 [[인도]], [[중국]]의 수입품을 유럽으로 운송할 수 있게 되어, 영국도 1875년에 경제 공황이 닥치는 매운 맛을 본 터였다. 또한 극동으로 확장중인 식민지를 관리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군사적으로는 [[제1차 아편전쟁]], [[세포이 항쟁]], [[제2차 아편전쟁]]을 연이어 치르면서 유사시 인도와 중국에 최대한 빨리 군사력을 투입할 수단이 필요해졌다.] 당시 [[영국 총리|총리]]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수에즈 운하의 주식 구입을 주도했는데 이때의 일화가 유명하다. [[제2차 중동전쟁]] 당시 영국 정부가 격앙된 반응을 보인 이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디즈레일리 총리는 '''저녁 식사''' 도중[* 일찍 먹고 신문을 보다 알았다고 한다.]에 이스마일 파샤의 지분이 '''1억 프랑(=400만 파운드)'''[* 구매력 가치설로 환산하면, 당시 4백만 파운드는 2022년 기준 2.5억 파운드(3억 달러)쯤 된다. 당시 [[GDP(PPP)/시대별#s-7|영국 GDP]]는 현재 가치로 1천억 달러로 세계 1위였다. 4천억원이면 얼마 안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당대의 영국 정부 총 지출액이 영국 GDP의 7% 정도였다. 즉 수에즈 운하 주식의 이집트 보유분이 그 해 영국 정부 예산의 5%쯤 되는 가격으로 나온 셈이다.]에 시장에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바로 운하를 구입해야겠다고 결정한다. 그리고는 주식을 매입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 프랑스의 수에즈 지분을 판 로스차일드와는 다른 분가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종가는 본래 빈에 있었고,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에 분가를 두어 서로 연계했다.]에게 연락해서 '''저녁 약속'''을 잡았다. 엄청나게 부유하긴 했으나 신분제 국가인 영국에서 평민 유대인 가문에 불과했던 로스차일드 가의 수장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대영제국 총리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고, 당일 약속 자리에 나와야 했다. 그 자리에서 총리로부터 400만 파운드의 자금 융통을 요청받았다. 로스차일드 측에서는 어떤 [[담보]]를 제시할 수 있는지 묻자, 디즈레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담보는 '''[[대영제국]]'''입니다." 총리는 남들보다 빠르게 주식을 사기 원했고, 세계최강국 영국을 담보로 내세운 것이다. 갑작스럽게 거액의 대출을 요청받아 다급해진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급하게 자택으로 돌아가면서 저녁 식사는 일찍 끝났다. 디즈레일리의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바로 마차를 타고 버킹엄 궁으로 직행해서, '''한밤 중에''' [[빅토리아 여왕]]의 알현을 요청했다. 그리고 자다 일어난 여왕에게 총리는 대영제국을 담보로 4백만 파운드를 로스차일드에게 빌렸으며, 이 돈으로 방금 시장에 나온 수에즈 운하의 이스마일 파샤 지분 전체를 매입하려 한다고 보고를 올린다. 즉 여왕에게 '''"폐하의 제국을 방금 유대인에게 담보로 잡았습니다."'''라고 말한 격이었다. 다행히 여왕은 수에즈 운하를 구입하려는 계획에 전적으로 찬성하며, 총리의 월권 행위를 책망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자국 공관을 통해서 주식을 전부 사겠다고 전달하고, 이스마일 파샤는 팔겠다고 말한 다음날 아침에 주식이 팔린 상황에 만족한다. 이후 로스차일드 측은 가문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이스마일 파샤에게 자금을 보냈고, 영국 정부를 대신하여 받아온 주식증서를 영국 정부에 넘겼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디즈레일리는 [[영국 하원]]으로 와서 의원들에게 "'''방금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영국 정부가 매입했다.'''"고 보고한다. 디즈레일리는 이미 선구매 후결재를 한 상황이었고, 누군가가 꼬투리를 잡으려 했다면 총리 목도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원 의원들은 모두 기립해서 열렬한 박수갈채와 함께 주식 매입안을 통과시켰다.''' 의회 보고는 내각이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영란은행]]으로 부터 400만 파운드를 대출받기 위한 선결 조건이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영란은행이 보유한 금으로 태환할 수 있는 400만 파운드 정도는 쉽게 빌릴 수 있었지만, 국고이기 때문에 절차가 오래 걸려서 로스차일드에게 제국을 담보로 잡게 된 것이다.] 의회 의결이 끝나자,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합의가 됐습니다! 이제 폐하의 것입니다!(it is settled; you have it, madam!)"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의 지분은 전술했듯이 개개인들에게 흩어져 있었는데다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주식들도 아니었다. 그렇게 수에즈 운하는 영국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운영에 개입하기 시작한 영국은 [[글래드스턴]] 내각 시기인 1879년부터 1882년까지 이집트에서 운하가 외국 정부에 의한 운영되는 것에 반대하는 우라비 반란이 벌어지자 군대를 보내 진압한다. 그리고는 1888년에 콘스탄티노플 협약으로 이집트와 수단을 중립국으로 만든 다음 운하 보호를 명목으로 [[알렉산드리아]]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이후 반란과 부패를 모조리 진압하고 운하를 운영한다. 통념과는 달리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공정하게 운영했는데, 프랑스의 요금 차별정책에 반발한 점도 컸다. 덕분에 영국 못지 않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도 운하의 혜택을 크게 누렸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발트 함대]][* 제2태평양 함대라고도 한다. 제1태평양함대는 러시아의 조차지였던 [[뤼순]]에 주둔한 [[극동함대]]를 말한다.]의 수에즈 운하 통행을 영국이 거부함에 따라 [[희망봉]]을 돌아서 극동으로 향하는 수개월 대여정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진이 빠져 [[쓰시마 해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는 설이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해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해군]]이 보유한 전함의 실제 [[흘수선]]이 수에즈 운하의 당시 통항제한수심보다 깊었기 때문에 통과를 하지 못한 것이다.([[https://brunch.co.kr/@yyounyuri/166|출처]]) 실제로 나중에 추가파견된 러시아 군함들은 규모가 작아서 수에즈 운하를 무사히 통과했다.[* 이를 제3태평양 함대라고 한다.] 그 무렵 [[영일동맹]]의 일환으로 영국에 주문한 [[일본 해군]]의 전함 [[공고(순양전함)|공고]] 역시 선체 규격이 수에즈 운하의 규격보다 커서 일본으로 향할 때는 [[희망봉]]을 통과해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아랍]] 방면에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위협하는 공세를 1915년에 단행했지만 [[영국군]]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후 1918년부터 1924년에 걸쳐서 이집트가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1936년에, 영국은 이집트와 협약(Anglo-Egyptian Treaty of 1936)을 맺고 운하의 운영권을 다시 획득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나서는 알렉산드리아 주둔 영국 해군[* 영국 해군의 지중해의 최대 거점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 해군 지중해 함대는 알렉산드리아와 지브롤터에 주둔했다.]은 추축국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행을 제한했다.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독일 북아프리카 군단은 [[이탈리아군]]과 함께 이집트 점령 및 수에즈 운하 차단을 시도했으나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패배하여 진격이 막히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